신주쿠 랑데뷰
1.5부 1장 신주쿠 내용 스포, 1.5부 서번트 진명 스포 있음
구다코 이름이 후지마루 리츠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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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신주쿠에 나타난 아종 특이점의 사건을 해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울리는 경보음에 급하게 달려가면, 관제실에서는 만능의 천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쉬는 중에 불러내서 미안해. 모처럼이니까 조금 더 푹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미 수복을 끝낸 특이점에 작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늘 있는 일인데 뭐. 이 정도는 괜찮아.”
“선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저도 괜찮습니다.”
변함없이 씩씩하게 대답하는 리츠카와 마슈를 보며 다 빈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응, 언제나 기운차서 좋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지난번에 해결했던 1999년의 신주쿠, 기억나?”
“거기는 수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특이점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원래라면 내버려둬도 원상복귀될 작은 특이점이라고 하셨던 말을 기억합니다.”
다 빈치의 설명에 마슈가 의문을 제시했다.
“응, 충실한 설명 고마워! 나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다 빈치가 손가락을 튕겨 지도를 확대하고 한 점을 가리켰다. 신주쿠, 그 중에서도 무너진 파티장 건물이 있던 지점이었다.
“딱 여기에 일그러짐이라고 해야 할지, 일렁임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미미하지만 아무튼 작은 오차가 생겼다고나 할까? 물론 이 정도는 방치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고, 리츠카 쨩이 특이점을 수복했으니 가만히 놔둬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만 신경쓰이는 건 신경쓰이는 거니까. 사소한 문제라고 숨기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고.”
“그럼 언제나처럼 해결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네.”
다 빈치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리츠카는 착용한 예장을 확인했다. 언제 경보가 울릴지 몰라 휴식 중에도 늘 칼데아 지급 기본 예장을 장착한 채였다.
“예장 상태는 오케이. 지금 바로 레이시프트 할 수 있으니 같이 다녀올 서번트를 불러올게.”
“역시 리츠카 쨩. 망설이지 않는구나.”
“뭔가 나오면 전투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시뮬레이션 룸에서만 계속 연습하는 것보다는 실전이 좋기도 하고!”
씩씩하게 대답한 리츠카가 그대로 관제실을 힘차게 달려나갔다. 다 빈치는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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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고마워, 잔 얼터,”
“흥,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만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잔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꽤나 들떴는지 언제나 입는 갑옷이 아닌 가벼운 사복 차림이었다. 아마 잔도 아직 신주쿠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는 모양이었다. 귀여워서 무심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리츠카는 잔과 함께 건물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그곳은 여전히 콘크리트와 철근투성의 폐허였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뭐가 있는 걸까? 잔해를 뒤져봐야 하나?”
“설마요. 여기까지 와서 육체 노동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기기 고장이라도 있었나 보죠.”
잔 얼터가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다른 목소리도 그 말에 동조했다.
“맞아. 굳이 찾을 필요도 없고 말이지.”
갑자기 서번트의 기척이 나타났다. 어새신의 기척 차단?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을 본 리츠카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너는…"
"오랜만이야. 칼데아의 마스터."
신주쿠의 어새신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사뿐하게 밟고 뛰어내렸다. 마지막에 본 그의 모습은 전투에 패배해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고, 예쁘던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는 전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분명 쓰러트렸을 텐데…"
“아, 분명 엄청나게 당했지.”
어새신은 태연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이 세계는 엉망진창에 허점투성이고, 나는 '신주쿠의' 어새신으로서 이 신주쿠에 매여 있는 몸이니까. 우연과 운명이 맞물려 몇 만 분의 일 정도의 확률로 다시 소환되어도 이상할 일은 없지 않을까?”
『확실히, 그런 일도 있을 수는 있겠네.』
통신기를 통해 다 빈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쓰러트렸던 적이 서번트, 성배의 잔향, 혹은 그 지역에 남은 무언가에 이끌려서 다시 나타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리츠카 쨩도 그것 때문에 자주 서번트와 함께 뒤처리를 하고.』
“하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좋네. 그러면 이해해주는 거야?”
『음~ 역시 그건 곤란해. 네가 나타난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네가 무엇을 하려는지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일단 지금의 나는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만 이해해주면 좋겠네. 이미 한 번 당해서 몸은 말이 아니고, 이미 끝난 승부에 매달리는 것도 취향은 아니야.”
리츠카는 어새신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신주쿠에서 만난 그는 도플갱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모습이 몇 번이고 덧씌워져 자기 자신도 스스로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의 그에게서는 동맹의 기지에서 셰익스피어를 고문하던 잔혹함도, 결전의 순간에 보았던 집착도, 무너진 건물 위에서 한탄하던 때의 체념도 볼 수 없었다. 결국 답은 그에게 직접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뭐야?”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새신이 웃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 칼데아의 마스터, 오늘 하루 동안만 나의 마스터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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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말 이런 걸로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까. 지금의 나는 서번트로서 마스터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말했잖아?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령주로 나를 자해시켜서 당장이라도 돌려보내도 되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리츠카가 한숨을 쉬었다. 신주쿠의 어새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리츠카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참을성 없는 마스터네. 곧 알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어새신의 손에 끌려가며, 리츠카는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정말 마스터가 되는 것만으로 되는 건가요? 선배에게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닌가요?』
마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신주쿠 어새신이 리츠카를 납치해 계속 칼데아에서 속을 썩였을 마슈로서는 어새신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까 말했잖아. 하루만 내 마스터가 되어달라고. 다른 뜻은 없어.”
『신주쿠의 어새신, 네가 하는 말은 알겠어. 그렇지만 리츠카 쨩은 칼데아의 소중한 마스터야. 아무런 근거 없이 너를 믿고 리츠카 쨩을 넘길 수는 없어.』
다 빈치도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신용할 수 없다는 말과는 다르게 이 만능의 천재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꽤나 여유로운 말투였지만. 어새신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거라, 좋아. 서번트와 마스터를 잇는다는 패스, 그걸 나한테 이어도 돼. 그럼 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지? 그리고 내가 당신의 제어를 벗어날 것 같으면 그…영주였던가. 그걸 써도 상관없으니까. 그럼 안전하잖아?”
“영주를 쓰기 전에 네가 나를 해치려고 할 확률은?”
리츠카도 질문했다. 어새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데아의 영주에는 한계가 있어서 계약한 서번트라 해도 행동을 온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하, 철저해서 좋네. 그렇지만 말이야, 그렇게 할 거라면.”
순간 돌풍이 일었다. 단 한 걸음으로 신주쿠의 어새신은 거리를 좁혀 리츠카의 바로 코앞에서 미소지었다. 감람석 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형형하게 빛났다.
“-이미 진작에 당신 목을 따고도 남았겠지.”
“그 더러운 얼굴 치우지 못해!”
놀란 리츠카가 뭐라고 입을 떼기보다도 빠르게 분노의 불꽃이 터져나왔다. 잔 다르크 얼터가 한 발 빠르게 멀찍이 물러선 신주쿠의 어새신을 노려보았다.
“어이쿠, 이거 실례.”
“마스터, 쓰레기는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지요. 저런 무례한 무뢰한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잔 얼터는 씩씩거리면서도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마스터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 모습을 보며 어새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처음부터 순순히 따라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이런이런, 그래도 한 번 일이 꼬이면 뭐든지 잘 되지 않는 법인가.”
“하아? 지금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 좋아요. 죽은 몸 주제에 화장이 덜 되어서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피곤하게 돌아다녀야 하는 게 불만이라면. 온 몸의 뼈와 장기를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드리죠. 어디 한 번 덤벼보세요!”
“싸움을 걸러 온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어차피 이 쪽 말은 순순히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들어온 싸움을 마다하는 것도 무뢰한의 도리가 아니지. 그럼 이야기하기 전에 한 판 먼저 붙어볼까?”
전투 태세로 들어간 두 서번트 사이로 닿으면 당장이라도 베일 듯한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에 먼저 손을 댄 것은 마스터였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불꽃을 뿜어낼 기세인 용의 마녀를 제지했다.
“괜찮아, 잔.”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고 그래요? 애시당초 당신이 경각심이 너무 없는 게 문제잖아요. 마스터라면 좀 더 마스터답게 행동하세요!”
“잔은 나를 걱정해 주는 거지? 고마워.”
리츠카는 잔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잔은 당황한 듯 눈을 맞추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은 정말로 괜찮아. 여기서는 나를 믿어주지 않을래?”
잡은 손 너머로 전해지는 리츠카의 의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스터의 고집을 아는 잔은 조금 짜증을 냈지만, 결국 그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말, 알았어요, 알았어! 여기서는 마스터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지요. 대신!”
“대신?”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불태워 버릴 테니까요. 저 어새신에 당신까지 한꺼번에.”
“응. 꼭 무사히 돌아올게.”
불신의 눈빛을 어새신에게서 거두지 않는 잔을 한 발짝 뒤로 물린 리츠카가 신주쿠의 어새신에게 다가가 의아해하는 어새신의 눈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요구, 받아들일게.”
리츠카의 말에 어새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호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야?”
“왜 먼저 제안해 놓고 네가 놀라는 거야?”
“아니, 이미 한 번 싸웠던 상대니까 신뢰받지 못해도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해서.”
잔과 대치할 때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지적하는 리츠카의 말에 어새신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리츠카 쨩의 의견이 그렇다면 우리도 무작정 반대할 수는 없네. 그래도 이쪽에서 계속 리츠카 쨩의 상태와 위치를 모니터링할 테니까, 허튼 짓을 했다가는 바로 리츠카 쨩을 이쪽으로 소환할 거야?』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여유를 되찾았는지 어새신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어새신은 리츠카가 내민 손을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럼 잘 부탁해,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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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아로 돌아가면 잔 얼터한테 엄청 혼나겠지. 그렇지만 잔이 자신을 걱정하는 만큼 화를 내주는 거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은 같이 훈련하지 못했으니 선물을 사가고 대신 다음에 단둘이 신주쿠에 오자. 그렇게 사과하는 시나리오를 짜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마스터. 먼저 들어가시지요.”
“여기는…”
신주쿠의 어새신이 과장된 몸짓으로 문을 여는 건물에 리츠카는 언젠가 이곳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칼데아에 오기 전 한 번 고등학교 입학 선물을 사주신다는 친척을 따라 들렀던 적이 있는 곳. 신주쿠 역 근처에 있는 백화점 거리의 유서깊은 백화점 중 하나였다. 불량배와 괴물과 자동인형이 범람하는 마경 신주쿠에서도 쇼윈도 속 마네킹은 변함없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업을 하는 거야?”
질렸다는 듯한 말투에 어새신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를 쓰러트렸을 때 파티에 왔잖아? 그것과 같은 이치지. 상황이 나쁘면 나쁠수록, 자원이 제한되면 제한될수록 인간은 다른 인간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사치를 누리고 싶어하는 법이라고.”
“인간이란 여러모로 대단하네…”
“그렇지?”
반쯤 비꼬는 말에도 생글거리는 얼굴은 변함없었다. 한숨을 쉬며 계속 어새신이 잡고 있던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마스터? 설마 이 정도로 넋을 잃은 건 아니겠지?”
“넋을 잃지 않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압도의 연속이었다. 폭력적일 만큼 원색적인 향기와 사방에서 반짝거리는 보석, 귀금속, 상품이 돋보이도록 화려하게 켜놓은 조명이 난반사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백화점에 올 일이 거의 없긴 했지만 마경 신주쿠의 백화점은 기억 속의 평범한 백화점보다도 훨씬 요란했다. 신주쿠의 어새신은 신나서 손을 이끌며 앞장서서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확인해봐. 자 봐, 저 쪽 목걸이가 예쁜데.”
“아니, 괜찮아. 이런 비싸고 사도 쓸 일 없는 물건 필요없어!”
“자 자, 사양 말고. 아니면 내가 직접 골라줄까? 어디…”
둘이 한참 매대 앞에서 실랑이를 하는 동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세레브 한 명이 부하들을 끼고 그 옆을 지나갔다. 거만한 말투로 부하들에게 저속한 농담을 하던 세레브의 눈에 화려한 백화점 안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를 한 신주쿠의 어새신이 들어왔다.
“아니, 저건 신주쿠의 어새신!”
벼락같은 호통에 리츠카와 어새신이 뒤를 돌아보면 거기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세레브가 이쪽을 바라보며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 녀석, 우리를 경호해 준다고 하더니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고, 건물은 폭파시키고! 네놈에게 넣어준 돈이 얼마인데! 우리를 배신하고도 이 신주쿠에서 무사할 줄 알았냐!”
악을 바락바락 쓰는 세레브를 눈앞에 두고도 어새신은 태평했다.
“아, 그런 일도 있었던가. 그것 참 미안하게 됐네!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런데 좀 나중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백화점에서는 목소리 좀 낮추고.”
“저, 저 녀석…!”
분노가 한계를 넘었는지 세레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레브의 부하들이 앞으로 나섰다. 꼭 미식축구 팀 같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한 리츠카의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전투와는 상관도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어새신이었다.
“어이쿠야.”
순식간에 어새신이 부하들 사이를 누비며 공격을 퍼부었다. 화려한 근육이 새겨진 몸을 마음껏 휘두르면 왼쪽에서 달려오던 놈은 걷어차여 나자빠지고, 오른쪽에서 파고들려던 놈은 주먹에 날아가는 꼴이 낙엽더미가 힘없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가볍게 부하 몇 명을 한꺼번에 제친 어새신이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세레브의 눈앞에서 몸을 솟구쳤다.
“핫!”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어새신의 발차기가 세레브의 정수리에 깔끔하게 꽂혔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세레브는 주위에서 부축할 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어새신은 굳어버린 마스터와 세레브의 부하들은 무시한 채 그대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신음을 뱉는 세레브에게 말했다
“아아, 큰일났네. 너무 귀찮게 굴어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깨트릴 뻔 했어.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마스터 때문에 온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목숨은 살려 줄 테니까, 거기서 얌전히 자고 있어?”
미안하다는 듯 말하고는 있지만, 어새신의 표정은 아까 악새서리를 고르던 때와 변함없이 즐거운 듯한 웃음이었다. 어새신이 먹이를 고르는 뱀처럼 부하들을 훑으면 개중 몇몇은 몸이 굳어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잊은 채 히익, 하고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할까? 너희 주인이랑 같이 여기서 한 숨 잘래? 아니면…”
“시, 실례했습니다!”
이 이상 덤비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세레브를 들쳐업고 허둥지둥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부하들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어새신 덕분에 위가 아파진 리츠카가 한숨을 쉬었다.
"어새신, 너…"
"이런, 마스터에게 무서운 꼴을 보여버렸네. 혹시 겁먹었어? 하하,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을 테니 기분 풀라고."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새신은 다시 쇼케이스 앞으로 돌아가 태연하게 액세서리를 구경했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걸 찾았는지 어새신이 점원을 부르자, 잔뜩 긴장한 점원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이거랑 이거 줘. 그리고 이것도.”
“저, 손님, 대금은…”
“아, 돈 말이야? 아까 쓰러져서 업혀갔던 녀석 앞으로 달아놔. 그 녀석 여기 자주 오지?”
아까의 광경을 전부 보았는지, 점원은 더 이상 깊게 묻지 않고 얌전히 어새신의 말을 따랐다. 어새신은 사냥에 성공한 강아지처럼 신나서 손에 든 쇼핑백을 흔들며 가져왔다.
“자, 마스터. 이거 한 번 걸쳐볼래?”
“이건?”
“목걸이랑 귀걸이, 그리고 팔찌인데.”
“…가격은 얼마 정도 하는 거지?”
“정말이지, 이 마스터는. 어차피 남의 돈인데 가격이 뭐가 중요해? 이런 건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최고라고.”
리츠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스터로 활약하면서 온갖 악인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 신주쿠의 어새신의 벡터는 다른 악한 서번트들과는 달랐다. 마음 내키는 듯 행동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을 위하고, 또 그러면서도 주위의 일은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도대체 이 막나가는 서번트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으로 머리가 꽉 찬 리츠카를 데리고 신주쿠의 어새신은 이번에는 여성복 코너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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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역시 잘 어울리네. 내가 골랐지만 보는 눈이 있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살 필요는 없잖아…”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의 쇼핑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목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힌 얇은 목걸이, 발에는 천연 가죽으로 만든 주홍빛 구두, 몸에 딱 달라붙는 겨자색 원피스에 명품에 무지한 자신도 알 만한 브랜드의 가방까지. 온 몸에 0이 몇 개나 붙어있는 상품을 겹겹이 두르고 걸으려니 몸보다도 마음이 무거웠다. 지친 것 같은데 조금 쉬는 게 어때, 하고 어새신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백화점 지하의 카페에서야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카페에서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듯 어새신은 커피에 케이크를 몇 조각이나 가져왔지만. 그래, 목걸이에 비하면 이건 껌값이겠지. 리츠카는 반쯤 포기한 채 포크로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어새신은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표정도 띄우지 않은 채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보고 있었다. 꿀꺽, 케이크 조각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마자 조급했는지 바로 질문이 날아왔다.
“어때?”
“…짜증나게 맛있어.”
“그건 다행이네. 제일 잘 팔리는 것들로 달라고 했거든.”
그제야 여유를 되찾은 어새신이 웃으며 자세를 풀었다. 의자에 기대 앉아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만을 보는 어새신에게 리츠카는 계속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네가 원하는 건 이게 전부야? 나한테 비싼 옷 입히고 맛있는 거 먹이기?"
"응. 그런데?“
원하던 대답은 들었지만 생각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어새신을 바라보며 리츠카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에 넌 주인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인형놀이를 하고 싶은 것 싶은데."
"인형놀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보통은 주인이 하인을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야?”
“글쎄, 마스터가 나한테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해 보고 있는데.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정식 마스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네가 제일 미워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상대인데.”
“글쎄, 왜일까나.”
장난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어새신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안타깝게도 리츠카는 얼굴에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휙, 대신 크림이 묻은 포크가 어새신의 눈앞에 흉기처럼 다가왔다.
“땡, 아깝네. 어떤 사람이 첫눈에 반한 사람을 납치해? 게다가 남장 좀 했다고 모습도 못 알아봤잖아. 아웃이야.”
“아, 들켜버렸다. 미안, 미안.”
“지금 별로 안 미안하지?”
리츠카는 짜증난다는 듯 일부러 케이크를 한 조각 크게 잘라서 입에 넣었다.
“어새신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평범하게 미남인데.”
“마스터가 원한다면 이대로 약속한 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
뭐든 진짜로 저지를 것 같아서 무슨 말도 못 하겠네. 자기 때문에 한숨을 쉬는 소녀의 곁에서 불한당은 남의 일처럼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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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재미있었어?”
“재미있었다고 해야 할까, 정신없었다고 해야 할까…”
신주쿠에 레이시프트했던 그대로 칼데아 지급 예장을 입은 리츠카는 신주쿠역 근처 공원 그네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백화점을 나오기 전 리츠카는 어새신이 샀던 물건들을 전부 가게에 돌려주었다. 다시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얼떨떨한 점원의 표정은 꽤나 볼거리였다. 어새신은 조금 불만스러운 것 같았지만.
“그 정도 물건쯤은 기념으로 가져가도 괜찮잖아? 세계를 구한 데 따라온 포상이라고 생각해.”
“안 괜찮아. 그리고 무언가를 받으려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흐음, 그럼 무엇 때문에?”
“나는 그냥, 살아남고 싶었어.”
붕, 리츠카를 태운 그네가 가볍게 공중을 갈랐다. 리츠카의 등을 밀어주며 어새신은 헤에,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샐쭉해진 리츠카의 핀잔에도 어새신은 별다른 반박 없이 잔잔하게 그네를 밀 뿐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석양에 스며들 때쯤 어새신의 질문이 날아왔다.
“당신은 부귀나 영화를 좇지 않는 거야?”
“그런 건 관심없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흐음.”
“왜, 답답해? 바보같아?”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어새신이 강한 어조로 리츠카의 말을 반박했다. 처음 듣는 어새신의 말투에 놀란 리츠카가 바닥에 발을 굴러 그네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네.”
이변을 깨달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의 몸이 금빛 가루로 변해 지는 해를 따라 조용히 사라져갔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리츠카가 외쳤다.
“어새신, 너 몸이……!”
“어이쿠, 시간이 다 됐나.”
정작 당사자는 누구보다도 태평했다. 아쉽다는 듯 손을 털며 물러서는 그에게 리츠카가 다그쳤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몸이 어떤지를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변명할 생각도 없는 듯 어새신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나 리츠카의 표정이 처참했는지, 애써 위로하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뭘, 우연과 운명이 겹쳐 기적적으로 같은 기억과 영기를 가지고 다시 소환된 몸, 거품같은 특이점의 변덕에 기댔을 뿐이니까. 이렇게 하루라도 버틴 게 용한 수준이지"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잖아."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던 거야."
아, 또 쑥스러운 말을 하면 싫어할 텐데. 작게 말한 어새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신과 함께 싸운 서번트, 모두 당신을 믿고 따랐으니까. 자신의 서번트가 싸운다고 공중에 매달려서 지시를 내리는 황당한 짓도 그렇고. 그래서 처음에는 화가 나고, 짜증도 났는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결국은 질투였을지도 모르겠네. 좋은 주인이라는 거, 나한테는 별로 인연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이라는 마스터와 함께하는 게 어떤 건지를."
"만족했어?"
"만족했고말고. 아니, 나도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무심코 진심이 되어버릴 뻔 했어."
"나는 계속 진심이었어."
깜짝 놀란 듯 커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상황에 적당한 감정을 찾지 못한 듯 어새신의 표정이 놀람과 부끄러움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것이 보였다. 결국 얼굴을 붉힌 어새신이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 마스터. 이거야 원,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네. 마지막까지 아쉬울 정도야.”
“너도 칼데아로 오지 않을래?”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알고 있다. 그는 환령을 이어붙인 영령, 실재할 리 없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권법의 이름으로 기적처럼 목숨을 얻은 존재. 그런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오늘의 그와는 이제 어디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데. 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고 있지? 기적은 두 번은 일어나도 세 번까지는 일어나지 않아. 아쉽지만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만약 또 다른 나와 만나더라도 그건 분명, 지금의 나와는 다를 거야.”
“연청.”
“그런 표정 하지 마. 나는 과거의 그림자,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 원래부터 이런 결말이 되는 걸로 정해져 있던 거야.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일 하나하나에 일일이 슬퍼해서는 안 되잖아?”
리츠카는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철갑은 먼저 사라지고, 그대로 드러난 부서져가는 따뜻한 맨손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이 마스터는!”
애써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연청이 눈썹을 내린 채 아쉽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으로 연청은 리츠카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었다.
“자, 시간 종료야. 요컨대 당신의 승리라는 거지.”
그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잡았던 손을 놓으면, 연청은 저녁 해의 마지막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럼 잘 가, 칼데아의 마스터. …정해진 결말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했어.”
어두워진 공원에는 모란도, 용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의 마스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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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소환을 시도하시려는 건가요?”
그 날도 무지갯빛 돌을 바구니에 담아서 소환실로 걸어가는 리츠카의 곁으로 다가온 마슈가 물었다. 낑낑거리며 돌을 옮기던 라츠카는 마슈와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었다.
“응. 어쩐지 오늘은 운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이런 건 감으로 운을 타는 게 중요하잖아?”
“그렇군요. 선배의 감이라면 확실하네요. 저도 최선을 다해 선배를 응원하겠습니다!”
“고마워! 역시 내 귀여운 후배의 응원 최고야!”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소환실에 도착했다. 방에 도착한 리츠카는 소환진 가운데에 손을 내밀고 조용히 영창을 외었다. 마슈는 그 곁에서 두 손을 맞잡고 소환이 무사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영창을 외울수록 리츠카는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소환진에서 밝은 빛이 퍼져나와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리츠카가 영창을 끝맺는 순간 주위로 따뜻한 금빛 기운이 퍼져나갔다. 빛이 사라지면 그곳에는 익숙한, 조금은 그리운 모습의 서번트가 서 있었다.
“여어! 그런 이유로, 클래스는 어새신, 연청이다! 그런데 말이지, 입다믈고 있으면 미남이라니, 칭찬이야, 그거?”